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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의 동상-모스크바

BeeHoney 2006. 6. 15. 16:23


 

 


                                                                                               



                                                                                                      Moscow 2005

 

 


 

영국에는 셰익스피어가 있고, 독일에는 괴테가 있듯이
러시아에는 푸쉬킨이 있다. 


우리도 접해본 푸쉬킨의 유명한 시.


   What though life conspire to cheat you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쉬킨)

 

 What though life conspire to cheat you,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Do not sorrow or complain.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Lie still on the day of pain,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And the day of joy will greet you.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Hearts live in the coming day.
 마음은 미래에 살고
 There's an end to passing sorrow.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Suddenly all flies away,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And delight returns tomorrow.
 지나간 것은 또 다시 그리움이 되나니.


우리네 어린 시절 낡은 책상 앞 벽에, 
학교앞  분식집 한쪽의 액자 속에서 자주 접했을 법한
시 구절로 몇 번씩을 따라 읽어 내려가며
어린 가슴에 작은 감동을 주었던 찡’했던 詩였다.

 

이 시는 `인생의 본질과 인간의 의식 깊숙이 자리 잡은
근원적 고독에 대한 성찰’을 그려내고 있다.

푸쉬킨은 이 시에서 오랜 유배생활에서 체득한 인생을
달관한 투로 차분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당시 러시아 봉건사회에서
시인들이 겪어야 했던  번뇌와 고독감을 자아내게 한다.


러시아인들은 아직까지도 푸쉬킨을 최고의 작가로 칭송하며
자신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는다. 
그것은 푸시킨이 남긴 시와 소설, 편지들이
러시아 인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그들이 꿈꾸는 이상에 대해
빛을 비추는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스크바 출신의 러시아 시인인 푸시킨. 
한국의 인사동 거리와 유사한 분위기의 아르바뜨 거리에도

그의 동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푸쉬킨의 동상과 그가 살았던 집,
그 집을 개조하여 만든 푸쉬킨 박물관이 있다.


윗사진은 동상 옆에 모여 젊음을 즐기고 있는 청소년들.

이들은 잠시후 바닥에 담요를 깔고

랩음악에 맞춰 서양식 브레이크 댄스를 추었다.

시대가 바뀐 이즈음의 이들에게도 푸쉬킨은 존경할만한 우상일지.

 


[참고] 푸시킨

 

1799 러시아 근대문학 개척자 시인 푸시킨
[Pushkin, Aleksandr Sergeevich, 1799.6.6 ~ 1837.2.10]은
모스크바 출생으로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확립자라고 알려져 있다.

명문 중류귀족의 장남으로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大帝)를 섬긴 아비시니아 흑인
귀족이었다. 유년시대를 백부 바실리와 그 친지인 카람진 제코프스키 등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영향하에서 자랐고, 1811∼1817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차르스코예셀로의 전문학교에 다녔다. 그 곳의 자유주의적 기풍, 나폴레옹 전쟁의
국민적 고양(國民的高揚),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들과의 교유 등은 그의 사상형성에
커다란 기반이 되었다.

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 ‘알자마스’에 참가하여, 1814년
시 《친구인 시인에게》를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졸업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외무성에 근무하였다. 혁명적 사상가 차다예프와의 교류, 데카브리스트의 한 그룹
‘녹색 등잔’에의 참가 등으로, 그의 농노제 타도의 정치사상은 차차 확고한 것이
되었다.

시 《차다예프에게 K Chaadaevu》(1818) 《농촌 Derevnya》(1819) 등도 이러한
배경에서 쓰인 것들이다. 1820년 최초의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i
Ljudmila》를 완성하였는데, 그것은 보수적인 의고전취미(擬古典趣味)에의
통타(痛打)가 되었다.

동년 《농촌》 등 자유를 사랑하는 내용의 시가 화근이 되어 남부 러시아로 유배되고,
키시뇨프 오데사에서 살았다. 이 시절에 데카브리스트 남부회의 구성원들과 사귀고,
그들의 사상에 공감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서사시 《카프카스의 포로 Kavkazskii
plennik》(1822) 《바흐치사라이의 샘 Bakhchisaraiskii fontan》(1823)을 비롯하여,
낭만주의의 특질이 강한 많은 작품을 썼다.

1824년 국외 망명에 실패하고 가령(家領) 미하일로프스코에 마을에 유폐되어 여기서
서사시 《집시 Tzygany》를 완성, 사실적인 시형소설(詩形小說) 《예프게니 오네긴
Evgenii onegin》(1823∼1830)의 집필을 계속하였고,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1825), 풍자적 서사시 《누손 백작》(1825)을 탈고하였다.

고독하고 불우한 유폐생활은 도리어 시인에게 높은 사상적 ·예술적 성장을
가져다주어, 러시아의 역사적 운명과 민중의 생활 등에 대하여 깊은 통찰의 기회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825년 12월 데카브리스트 괴멸 후, 그들과 친교가 있던 그는
이듬해 수도로 소환되었다.

친구를 잃었던 수도에서의 고독에도 좌절하지 않고, 1828년 역사시 《폴타바
Poltava》를 완성하였다. 1830년에는 보르지노 마을에서 소비극(小悲劇) 4편 《인색한
기사 Skupoi rytsari》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Motsart i Salieri》 《돌의 손님
Kamennyi gosti》 《질병 때의 주연(酒宴) Pir vovremya chumy》, 그리고 《벨킨
이야기 Povesti Belkina》 등을 탈고하였다.

그 해에 《예프게니 오네긴》도 완성하였으며, 이것은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의 달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당시 러시아 사회의 특질을 남김 없이 그렸다.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는 산문소설 《스페이드의 여왕 Pikovaya dama》(1834) 《대위의
딸 Kapitanskaya dochka》(1836) 등을 써,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초석을
쌓았다.

마지막 서사시 《청동(靑銅)의 기사 Mednyi vsadnik》(1833)에서는 전제적 국가권력과
개인과의 대립 모순을 조명(照明)하고, 제정 러시아의 역사적 숙명을 제시하였다.

1837년 1월 27일 그는 아내 나탈랴를 짝사랑하는 프랑스 망명귀족 단테스와의 결투로
부상하여 2일 후 38세의 나이에 죽었다. 이 결투는 명백히 그의 진보적 사상을
미워하는 궁정세력이 짜놓은 함정이었다고 한다.

푸슈킨의 작품은 모두 농노제하의 러시아 현실을 정확히 그려내는 것을
지향(志向)하였으며, 깊은 사상과 높은 교양으로 일관되어, 후의 러시아 문학의 모든
작가와 유파(流派)는 모두‘푸슈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처:
두산백과)

 

 

푸시킨 연보

 

1799년 5월 26일, 모스크바의 니에메쓰카야 가(街)(현재의 바우만 가)에서 탄생
1811년 8월 12일, 뻬쩨르부르크 교외, 짜르스코예 셀로에 창설된 학습원에 입학
1814년 7월 4일, 『유럽통신』지 13호에 시「친구인 시인(詩人)에게」를 발표
1815년 1월 8일, 학교 진급시험에서 자작시「차르스코에 셀로의 회상」을 낭독하여,
당대의 대시인 제르자빈의 격찬을 받음.
1817년 6월 9일, 학습원 졸업. 6월 외무성 8등관에 임명. 9월
문학서클‘알자마스’회에 가입.
1819년 7월 농노제의 참상을 노래한 시「농촌 마을」을 쓰다.
1820년 3월, 학습원 시대에 쓰기 시작한 최초의 서사시「류드밀라와 루슬란」완성.
뻬쩨르부르크 총독에게 혁명적 정치시의 건으로 소환, 심문을 당하다.
       5월 6일, 남러시아로 추방. ‘자유애호’의 정치시를 퍼뜰린 혐의.
1822년 8~9월,「카프카스의 포로」간행
1823년 5월 9일, 운문소설[예브게니 오네긴]을 쓰기 시작하다. 7월 3일 오데사로 전근
1824년 3월 10일, 장편시「바후티사라이의 천수(泉水)」간행. 6~7월,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국외로 탈출을 계획.
       7월,시「바다에」.알렉산드르 1세의 명령으로 미하일로프스코예
           촌(村)으로 추방됨. 11~12월, 다시 국외탈출을 계획
1825년 2월 15일,「예브게니 오네긴」제1장 간행. 장편시「집시」완성.
11월7일,「보리스 고두노프」완성.
12월 13~14일,서사시「누린 백작(伯爵)」을 쓰다. 12월30일,「알렉산드르
           푸쉬킨 시집」간행
1826년 1월 3~4일,「예브게니 오네긴」제4장 완성.
       8월 27일, 니콜라이 1세, 푸슈킨을 모스크바로 소환.
       9월 8일, 모스크바 도착.「예브게니 오네긴」제3장 간행
1828년 1월,「예브게니 오네긴」(1825)에 관한 사건으로 푸쉬킨에게 비밀 감시가
붙다.
       8월 3~5일, 무신론적 서사시「가뷔리아드」(1821)에 관해 뻬쩨르부르크
           총독의 신문을 받다.
       10월 2일, 니콜라이 1세에게 서한을 올려「가뷔리아드」의 작가임을 고백.
       11월 4일,「예브게니 오네긴」제 7장 완성.
1829년 3월 27일,「뽈따바」간행.
       5월 27일,「알렉산드르 푸쉬킨 시집(詩集)」제1부 간행.
       6월 26일, 제2부 간행.
1830년 3월 11일, 잡지「북방의 밀봉」에 브르가린이 푸쉬킨 비방문 게재. 이때부터
푸쉬킨의 공격이 시작되다.
       5월 6일, 나탈리아 콘챠로바와 약혼.
       9월9일,「장의사(葬儀社)」,14일,「역장(驛長)」완성. 20일,「가짜 농부
           딸」,25일,「예브게니 오네긴」
        제9장을 쓰다. 이것으로「예브게니 오네긴」제10장을 소각.
        20일,「눈보라」완성. 23일,「인색한 기사(騎士)」,
 26일,「모차르트와 살리에르」완성,
       11월4일,「석상(石像) 손님」완성.
       12월22~23일,「보리스 고두노프」간행.
1831년 2월 18일, 나탈리아 콘챠로바와 결혼.
       5월27일,벤켄도르프에 신문 발행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함.
       9월13일,「사제(司祭)와 그 하인 바르다의 이야기」완성.
       11월14일, 외무부에 들어가다. 11월,「베르킹 이야기」간행.

1832년 1월 10일, 헌병 사령관으로부터 모든 작품을 집필할 때마다 검열을 맡을 것을
명령받다.
       1월 말,「예브게니 오네긴」마지막 장 간행. 5월19일, 장녀 마리아 출생.
1833년 1월 7일,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이 되다. 1월31일,「대위의 딸」을 기고(起稿).
       2월19일, 장편시「코롬나의 오두막」간행. 3월 25일,「예브게니
            오네긴」전장 처음으로 함

       7월6일,장남 알렉산드르 출생. 10월14일,「어부와 물고기 이야기」
            24~27일,「안젤로」. 30일,34세로서「연소 시종」에 임명되다.

1834년 1월 17일, 푸쉬킨의 부인 궁중(宮中)에 소개되다.
       3월 1일,「스페이드의 여왕」발표(1833년 말~34년 초의 작품).

           8월,「알렉산드르 푸쉬킨 이야기집」간행.

           9월 2일,「금계(金鷄)」를 쓰다. 11월,「푸가초프 반란사 (反亂史)」간행.


1835년 3월 1일,「서부 슬라브인의 노래」간행.
       4월12일,차남 그레고리 출생.

           6월1일, 재정적 애로를 타개키 위해 3·4년간 시골에서 살고 싶으니
           허가해 달라는 서신을 베켄 도르프에게            냈으나 니콜라이 1세
           허가치 않음.

          7~8월, 정부 대여금 3만 루블을 받다.

1836년 3월 29일, 어머니 사망. 4월,「금계」간행.

           4월11일,푸쉬킨의 개인 잡지『소브레멘니크} 제1호를 발간.

           5월23일 차녀 나탈리아 출생.

           10월19일,「대위의 딸」완성,『소브레멘니크』제4호에 전재(全載).

            11월4일,‘오쟁이 진 사나이’라는 비방문을 받다.

            11월5일,아내에게 구애(求愛)하는 러시아 군(軍)근무,망명 프랑스인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

            11월6일,양부(養父)인 홀란드 공사(公使)헤켈른이 푸쉬킨을 방문,결투
            15일간의 연기.

            2월 13~14일,단테스가 처형 예까쩨리나와 결혼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결투신청을 철회.

            2월16일,재차 결투를 신청.

            11월17일,주선인끼리의 타협으로 재차 철회.

1837년 1월 10일, 단테스,푸쉬킨의 처형 예까 쩨리나와 결혼. 그 후도 단테스는
노골적으로 아내에게 구애함.

           1월26일,푸쉬킨,헤켈른에게 모욕적인 서신을 보내자 이번에는 단테스가
           결투를 신청.
           1월27일,하오 4시 반 결투. 푸쉬킨 치명상을 입다.
                 28일,빈사의 푸쉬킨은 아내,자식,친구들과 고별. 29일 하오 2시
                 45분 사망.

    2월 1일, 교회에서 장례식. 정부는 일반 민중의 참열을 금지하는 동시에
           과격한 추도 기사를 못쓰게 언론기관에 명령. 2월5일,유해는
           헌병들에 의해 스바야트 골스키 수도원으로 옮겨, 2월6일 새벽에 매장됨.


 

태워버린 편지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안녕, 사랑의 편지여 안녕
그 사람이 이렇게 시킨 것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나는 주저하고 있었던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나의 손은 모든 기쁨을 불에 맡기려고 맹세하였던가
하지만 이제 지긋지긋하다
시간이 찾아왔다 불타라 사랑의 편지여!

나는 각오하고 있다
마음은 무엇에도 현혹되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불꽃은 벌써 나의 편지를 핥으려 한다
이제 곧······· 활활 타올라 엷은 연기가
얽히면서 나의 기도와 더불어 사라져간다
이미 변치 않을 마음을 맹세한
반지로 찍은 자국도 사라지고
녹기 시작한 봉랍이 끓는다
오오, 신이여!

그일은 끝났다. 검어진 종이는 휘말리고 말았다
지금은 가뿐한 재 위에 그 숨겨진 자국들이
새하얗게 남고·······
내 가슴은 조여진다. 그리운 재여
나의 애처로운 운명 위에 그나마 가련한 기쁨이여
내 한탄의 가슴에 영원히 머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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